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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책방] 새 마음으로 - 이슬아

minigb 2022. 2. 11.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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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얘기를 이렇게 쭉 한 거는 처음이에요. 얘기를 하니까 행복하네."
순덕 님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삶이라는 게 몹시 길게 느껴졌다. 순덕 님과 같은 일흔 살이 되기에 나는 아직 먼 것 같아서다. 울면서도 완벽하게 청소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내 노동으로 일군 자리에 다른 이를 초대할 수 있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 어른이 되어가고 싶다. ('응급실 청소 노동자 이순덕' 중,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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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제가 신지 언니 책 읽으며 너무 놀랐던 부분이 또 있어요. 스트레스에 관한 인숙 씨의 대사였죠.

어느 날 퇴근길의 버스에서 인숙 씨의 전화를 받았다.
"딸, 어디."
"버스. 이제 집에 가."
"아홉 시 넘었는데 인제 퇴근했나?"
"어. 야근했어."
"목소리에 기운이 없네"
"저녁도 못 먹었어. 요새 일이 너무 많아. 아, 스트레스 받아..."
"어마야. 니 스트레스를 왜 받나. 그거 안 받을라 하믄 안 받제."
"..."
아니 스트레스가 무슨 전화인가. 안 받을라 하믄 안 받게
-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17쪽

윤인숙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빨리빨리 잊어버리려고 해. 스트레스를 안고 꿍해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상해버리잖아. 새 마음을 먹는 거지.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야. ('농업인 윤인숙' 중,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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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찬 나중에 퇴원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 어느 날 할머니가 나한테 그래. 미안하대. 그래서 "무엇이 미안하오?" 물었더니 할머니는 그냥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만 그러는겨. 내가 그랬지. "여보. 나 그렇게 아파서 사경을 헤맬 때 당신이 몇 년을 간호했는데, 내가 미안하지 왜 당신이 미안하오?" 그렇게 말해도 계속 미안하다고만 말해. 환장하겠는 거야. "속 시원히 터놓고 얘기합시다." 했지. 할머니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말해. "당신이 너무 오래 아파서 내가 의사 선생님한테 당신 안락사시켜달라고 말했었어요. 이건 평생 가슴에 묻어둔 비밀이었는데 이제 당신이 다 나았응께 말할 수 있어."
내가 말했어. "여보. 당신 그 말 참 잘했소. 내가 어떻게 병을 이기고 살아 나왔는가 알게 되었네. 당신이 나를 살렸네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뭔 소리냐고 해. 나는 할머니한테 이야기를 들려줬지. "병상에 누워있을 때 내 앞에 죽음의 능선이 있었어요. 이 너머는 절벽이야. 절벽 밑에는 저승사자가 있었고요. 내가 절벽으로 떨어지면 딱 끌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던 저승사자였어. 그때 갑자기 어떤 여자가 느닷없이 와서 내 등을 밀어버린겨. 그게 당신인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저승사자가 깜짝 놀란 거야. 예상보다 빨리 떨어져 내려오니까. 얼떨결에 나를 받긴 했는디 아직 죽을 놈이 아닌 것 같은 거야. 저승사자가 당황해서 나를 저승에 안 데리고 가기로 한 거지. 당신이 갑자기 날 죽이라고 툭 튀어나와서 저승사자를 놀래킨겨. 긍께 당신이 진짜 잘한 거야."


이슬아 할아버지, 즉석에서 지어낸 얘기였어요?


장병찬 할머니 말 듣고 바로 지어냈지. 할머니가 죄책감에 한이 맺혀서 너무 괴로워하니까 내가 뭐라고 말해야겄어. 위로의 말을 해야지. 당신이 나를 살려낸 이야기를 막바로 지었지. 이야기로 할머니를 달랠 수가 있자녀. 그러고서 할머니 등을 한참 쓰다듬었어. ('아파트 청소 노동자 이존자, 장병찬' 중, 148~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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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연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버킷 리스트에 관한 책이었어요. 그걸 인쇄하면서 나도 꼭 그런 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써봤더니 50가지 정도 되더라고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이요. 주로 퇴근하고 할 수 있는 여러 취미 생활에 관한 것들이었어요. 부지런히 실천해서, 벌써 다 해봤어요.(웃음) ('인쇄소 기장 김경연' 중,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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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퇴근하고 나서는 가족 분들이랑 주로 시간을 보내시나요?

김경연 거의 그렇죠. 아내는 저한테 불만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이제 그 말이 지겹대요. 맨날 사랑한다고 하니까 좀 다른 표현으로 해달라고 하는데, 다른 표현이 뭔지 모르겠어요. 제가 나름대로 생각해서 말해봤는데 다 안 먹히더라고요.(웃음)

이슬아 부장님, 제 책에 사랑의 언어가 되게 많아요.(웃음) 제가 쓰는 글은 대부분 사랑한다는 말의 변주거든요. ('인쇄소 기장 김경연' 중, 189~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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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옥 혼자 회계 일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마주해야 할 때가 오면, 그 깐깐함이 제 얼굴에도 드러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다가오는 분들이 저를 어려워하기도 하세요. ('인쇄소 경리 김혜옥' 중,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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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실장님도 종종 실수를 하시나요?


김혜옥 하죠. 늘 하던 일인데도 실수할 때가 있어요. 약간 안일한 마음으로 '그냥 넘어갈까? 하고 넘어갔던 부분에서 꼭 사고가 나더라고요. (중략) 어느 한 파트에서라도 잡아주면 사고가 되지 않는데요. 여러 파트가 조금씩 무심하게 일하면 이렇게 사고가 나요. 서로 꼼꼼해야 하는 것 같아요. ('인쇄소 경리 김혜옥' 중, 214~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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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가끔은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서 내 삶이 필름처럼 돌아가.

이슬아 주마등처럼요?

이영애 응.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촤악 스쳐 가는 거야. 젊었을 땐 남편이랑 바람 피우고 살림 차린 젊은 여자도 참 미워했고, 우리 시어머니도 미워했어. 이제는 아무도 밉지가 않아.

이슬아 왜 안 미우세요?

이영애 몰라. 어느새 이해가 돼. 안 미워. 그 여자들도 안쓰러워. 그들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게 안리 거야. 그 사람들 삶도 기가 막혀. 그래서 안 밉더라고. ('수선집 사장 이영애' 중,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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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고 해가 뜨고 아침마다 집에 빛과 바람이 든다는 사실에 언제까지나 놀라고 싶다. 새 마음으로. 새 마음으로. ('에필로그' 중, 284쪽)


이슬아 작가님은 '아무튼 출근'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걸 우연히 보고 알게 됐다. 프리랜서로서 혼자 일하시지만, 마치 감시자가 있는 것처럼 흐트러지지 않게 생활하시는 게 너무 멋있었다. '집이지만 완벽한 사무실을 만들어 놓으셨네요.'라는 패널의 말에 '네, 왜냐하면 저는 상사가 없잖아요. 제가 제 상사이기 때문에 공간으로 잘 분리(해놨어요)'라고 대답하신다. 본인이 본인의 상사라는 표현에 꽂혀서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님을 보면서 계속 좋은 자극 받으려고 한동안은 밥 먹을 때마다 이 영상을 틀어놓기도 했다.

그 후에 세바시에 출연하셔서 말씀하신, '글쓰기란 부지런한 사랑이다'라는 표현이 너무 예뻐서 작가님의 글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최근에 인터뷰집을 출간하셨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침 그때 인터뷰라는 것에 관심이 생기던 참이었고, 이 모든 게 뭔가 탁탁 맞아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책을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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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세상'이 있다는 걸 느낀다. 투자와 재테크를 처음 접했을 때, 뮤지컬에 빠졌을 때, 회사에서 일할 때, 운동을 시작했을 때 등. 최근에는 더현대에서 우연히 식기 섹션에 갔다가 다양한 종류의 예쁜 것들을 봤을 때.

그럴 때, 이런 세상이 있는지 몰랐던 과거의 내가 너무나도 무지했다고 느껴진다. 더 나아가서 그때의 무지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이 세상을 미리 접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약간 우스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뭔가 부끄러워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정말이지 다양한 세상이 있다는 걸 느꼈다. 창작의 세상에서 살아가시는 이슬아 작가님의 글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작가님이 담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들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는 경이로웠다.

세상은 넓고 그 세상에는 다양한 세상들이 있고 그곳에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감각을 곤두세운 채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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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책을 정말 많이 읽어야겠다. 한때 '쉬는 시간에 책을 읽는 교양있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농담을 자주 했는데, 진짜로 실천해봐야겠다.

책과 너무 오랫동안 멀게 지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도 없었던 거 같다. 예전에 유명한 작품들을 좀 알고자 내용은 모르지만 이름은 들어본 소설책들을 몇 권 구매한 적 있는데, 내가 관심 있는 게 아니다 보니까 결국엔 안 읽게 되더라.

이 책 한 권을 읽는 데 최소 3~4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봤더니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책 읽는 행위가 생각보다 사소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우선은 내가 재미있게 느끼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사소하게 책을 읽는 습관부터 들여보려고 한다. 유명한 작품들은 그 후에 하나씩 읽어봐야지.

책을 많이 읽고, 그걸 통해서 또 새로운 세상들을 접하고, 영감을 얻고, 그걸로 나를 각성시키고, 그렇게 살아가야겠다.